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 당일 아침, 전국 수십 개 투표소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투표소 문은 열렸는데 투표용지가 없었다.
서울 노원구, 강서구, 경기 수원시, 인천 남동구, 부산 해운대구. 줄을 서서 기다리던 시민들이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채 발을 굴렀다. 어떤 이는 출근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돌렸다. 어떤 어르신은 무릎이 아파 20분을 기다리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그 어르신이 오후에 다시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기록 자체가 없으니까.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해명은 짧았다. 수량 오산이 발생했으며 오전 중으로 해소됐다. 그것이 전부였다. 왜 오산이 났는지, 어디서 몇 명이 영향을 받았는지, 단 한 줄의 설명도 없었다. 납득이 되는가.
닫혀 있는 것은 선관위만이 아니다
선거 행정의 불투명함을 보면서 필자는 다른 풍경을 떠올렸다. 영상 산업, 방송 산업, 문화계 전반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블랙박스들이다.
누가 심사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뽑히는가. 왜 이 작품은 되고 저 작품은 안 되는가. 영화 지원금은 어떤 근거로 배분되는가. 방송 편성권은 누구의 손 안에 있는가. 선관위가 투표용지 수량 산정 공식을 공개하지 않듯, 문화계 역시 핵심 기준을 닫아두는 경우가 많다. 과정이 보이지 않으니 결과만 남는다.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면 불평꾼이 된다.
2022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2026년에도 반복됐다. 선거 행정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문화계 지원 사업도, 방송 편성도, 영상 산업의 단가 구조도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뀌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같은 불합리가 반복된다.
공정성은 공개에서 시작된다
에스토니아는 선거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전면 공개했다. 전 세계 누구든 들여다보고 오류를 신고할 수 있다. 독일은 투표 관리 권한을 지역 단위로 분산시키고 시민과 참관인이 그 과정에 참여한다. 핀란드는 투표소별 데이터를 선거 종료 후 즉시 공개한다. 세 나라의 공통점은 하나다. 닫지 않는다.
문화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영화 지원금 심사 기준이 공개되면 납득하지 못한 채 탈락한 감독이 줄어든다. 방송 편성 기준이 투명해지면 연줄이 아닌 실력이 기회를 만든다. 영상 제작 단가 산정 기준이 공개되면 20년째 제자리인 단가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 공정성은 선언이 아니다. 공개에서 시작된다.
심형래 감독이 블록버스터에 도전했을 때, 그 도전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문화계가 검증된 공식 밖의 시도를 받아들일 구조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기준을 만들고, 누가 그 기준을 적용하는지 과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도전보다 관습이 이긴다.
기록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그날 아침 발걸음을 돌렸던 시민들의 한 표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원금을 받지 못한 채 현장을 떠난 영상 제작자들의 이름도, 편성 기회를 얻지 못한 감독들의 작품도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으면 개선되지 않는다. 개선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를 보유한 나라다. 반도체를 설계하고 세계에 파는 나라다. K콘텐츠가 전 세계를 흔드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투표용지 수량 하나를 정확하게 배분하지 못하고, 영상 산업의 단가가 20년째 오르지 않으며, 도전하는 감독이 외면받는 구조가 유지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다. 시스템을 열 의지, 과정을 공개할 의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할 의지의 문제다.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민주주의는 결과만이 아니다. 문화도 결과만이 아니다. 과정이 투명해야 진짜 민주주의고, 과정이 공정해야 진짜 문화 산업이다. 선관위도, 문화계도, 영상 산업도 지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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