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MTV단지의 한 공장. 그 안에서 26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원컨덕터 지상현 대표, 올해 예순셋이다. 회사 이름 아래에는 늘 같은 문장이 붙어 있다. “since 2000 · 믿음을 만드는 사람들.” 규모나 매출을 묻는 질문에 그는 매번 다른 단어를 먼저 꺼냈다. 사람, 그리고 신뢰였다.
Thank you for reading this post, don't forget to subscribe!PART 1토목을 하던 사람이, 왜 초고압이었나
지금은 초고압 도체·접속재 전문가로 불리지만, 그의 출발점은 전기와 거리가 멀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건축 분야에 오래 몸담았던 그가 낯선 세계로 방향을 튼 것은 서른일곱, 적지 않은 나이였다. 아내와 조용히 분식집이나 차릴까 하던 그를 붙잡은 것은, 그동안 쌓은 경력과 인적 자원이 아깝다는 지인의 권유였다.
그렇게 그는 기계와 선반 한 대로 공장 문을 열었고, 완전히 다른 업종을 스스로 공부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그가 보유한 초고압 특허가 30여 건이라는 사실은, 그 전향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PART 2첫 소재를 빌려준 사람들
26년을 버텨온 힘을 스스로 꼽자면 결국 하나로 모인다. 신뢰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무렵,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수주는 받았는데 금형을 만들 재료비가 없어 손을 놓고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주변 거래처들이었다.
“왜 내 거 안 쓰냐고 하더라고요. 돈이 없어서 떼먹을 수도 있다고 했더니, 너는 떼먹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소재를 빌려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는 이 신뢰가 쌓이는 방식을 잘 안다. “지금 당장 이익을 보면 2차, 3차가 힘들어요.” 대신 믿음이 가고 진실하게 하다 보면 끝내는 알아봐 준다는 것이다. 다만 그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거짓이 하나 뻥 터지면, 그걸 밝히는 데는 세 배, 네 배, 열 배가 들어가요. 쫄딱 망하고 나서 진실이 밝혀지면 뭐 하겠어요. 너무 늦을 때가 있다고.”
그 신뢰는 국경도 넘었다. 원컨덕터는 영국 ICORE INTERNATIONAL GROUP과 미국 BAL SEAL ENGINEERING의 접속재·도체를 한국에 공급하는 계약을 맺고 ‘글로벌 원컨덕터’라는 이름값을 한 걸음씩 쌓아 왔다.
PART 3소수 때문에 다수를 망치지 말자
직원들과의 관계를 두고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저요? 욕만 먹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정은 조금 다르다. 명절이면 30명에서 50명에 이르던 직원들에게 그는 거래처 임원급에게나 보내던 20만~30만 원짜리 선물 세트를 똑같이 챙겨 보냈다. 귀향길 차비로 10만~30만 원을 얹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속을 썩이는 것은 늘 한두 사람이었다. 한우 세트를 두고 “질기다”, “광우병” 운운하거나, “10만 원이 누구 코에 붙이냐”는 소리가 나오면 그는 상처를 받았다. “잘못 갖다 놓은 것도 아닌데.” 그럴 때면 홧김에 한두 해 선물을 끊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시작하길 반복하며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소수 때문에 다수를 망치지 말자. 누가 욕하든 말든 내 할 일 내가 하자.”
PART 4아침, 그리고 506번째 감사일기
이 모든 태도의 밑바탕에는 그의 아침이 있다. 지 대표의 하루는 세 가지 의식으로 시작된다. 일어나면 미지근한 물 한 컵과 영양제, 통창 커튼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태양을 마주하는 되새김, 그리고 출근길 30분. 그 30분 동안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연을 맺은 180명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는 축하를 건넨다. 어디서 주워 온 글이 아니라 직접 읽고 듣고 다듬은 말들이다.
감사 일기도 빼놓지 않는다. 휴대전화에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이날로 506번째. 1년 반 가까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침에 느낀 것을 쓰고 저녁에 감사한 것을 쓴다. 메모장은 그의 또 다른 무기다. 업체별, 특허별, 차량 관리에 아이디어까지 카테고리로 나눠 관리하고, 명함 정리법으로는 특허까지 냈다.
공장 벽 곳곳에는 문장들이 붙어 있다. ‘기본에 충실한 자가 결과를 지배한다’, ‘믿음을 만드는 회사’, ‘One can do it’. 그중 상당수는 직원 이재원 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물 위에 뜬 배가 가만히 있으면 뒤로 밀리듯,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멈추지 않는 꿈’이라는 문구도 그렇다. 지 대표는 그 문장을 아직도 머릿속에 안고 다닌다고 했다.
올해 그가 정한 화두는 직원들의 의식 변화다. 감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 그는 이미 직원들은 물론, 자신이 회장을 맡은 산업기술대 대학원 동문들까지 직접 AI 활용법을 가르쳐 왔다. 스스로도 AI 세 종류를 쓰며 ‘나에게 맞는 비서’를 만드는 중이다. “제가 백을 다 끌고 갈 수는 없어요. 다만 삼십이든 사십이든 시작되면 차이가 느껴질 거고, 그러면 스스로 안 할 수 없게 되겠죠.” 그는 언론에 자신의 계획을 내보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공표해 놓으면 아무래도 더 실행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나 스스로와의 약속인 거죠.”